며칠 전까지만 해도 더워 죽겠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문을 열었는데 바람이 서늘하다.
좋다.
에어컨을 안 켜도 된다.
걷기도 좋다.
분명 좋아졌는데 이상하게 기분은 조금 가라앉는다.
별일은 없다.
돈을 잃은 것도 아니고,
누가 떠난 것도 아니다.
그냥 여름이 끝나는 중이다.
그런데 꼭 무언가 하나 끝난 느낌이 난다.
가을을 탄다는 말을 괜히 만든 것은 아닌가 보다.
햇빛이 줄면 몸도 안다
가을부터 낮이 짧아진다.
사람의 수면과 각성, 기분은 빛의 영향을 받는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는 겨울형 계절성 정서장애에서 짧아진 일조시간과 일주기 리듬, 세로토닌·멜라토닌 변화가 관련될 가능성을 설명한다.
일부 사람은 실제로 가을·겨울에 반복되는 우울증상을 겪는다.
그렇다고 아침에 조금 허전했다고 병명을 붙일 필요는 없다.
며칠 계절을 타는 것과 수개월 반복돼 생활까지 무너뜨리는 계절성 정서장애는 다른 얘기다.
그런데 나는 빛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가을은 귀로도 온다
한여름은 생각보다 굉장히 시끄럽다.
아침부터 매미가 운다.
낮에는 더 심하다.
밤에도 벌레 소리가 난다.
창문을 열면 어딘가에서는 계속 살아 있는 소리가 난다.
그렇게 몇 달 듣고 살다 보면 별생각도 안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조용하다.
매미 소리가 없다.
그때서야
“아, 끝났구나.”
싶다.
자연의 소리환경 자체가 사람의 정서와 스트레스 반응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는 있다. 자연음을 듣는 것이 완전한 정적보다 일부 생리적 스트레스 지표에서 더 유리했다는 체계적 문헌고찰도 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들 했다.
매미도 그런 것 같다.
한창 울 때는 시끄럽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창문을 닫아도 들리고,
길을 걸어도 들리고,
낮잠을 자려고 누워도 들린다.
그런데 막상 울음이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빈자리가 들린다.
어제까지 아무 생각 없이 깔려 있던 여름의 배경음 하나가 통째로 빠져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매미가 사라져서 우울해진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연결은 아직 내 쪽의 추측이다.
하지만 여름을 구성하던 거대한 배경음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은 꽤 강한 계절 신호다.
사람은 소리가 있을 때보다,
있던 소리가 없어진 뒤에야 그 소리가 얼마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달력보다 귀가 먼저 여름이 끝났다는 걸 알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세상이 밤을 닮아간다
가을은 밝기도 줄고,
소리도 줄어든다.
저녁은 빨리 온다.
기온은 내려간다.
사람은 집으로 빨리 들어간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녁 8시가 훤했는데 어느새 퇴근길부터 어둡다.
그다음에 오는 것은 겨울이다.
이 변화가 왜 쓸쓸한지 생각하다 보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든다.
가을은 세상이 점점 밤을 닮아가는 과정 아닐까.
인간이 어둠에서 위협과 공포에 더 민감해질 수 있다는 실험연구는 있다.
어둠에서 놀람반사가 증가했고, 밤이라는 조건 자체가 공포자극에 대한 반응을 강화한다는 연구도 보고돼 있다.
밤과 겨울을 인간이 진화적으로 두려워해서 가을마다 쓸쓸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 연결까지 직접 증명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한 가지 가설은 세워볼 수 있다.
밝고 시끄럽고 따뜻했던 환경이
어둡고 조용하고 추운 방향으로 움직인다.
머리는 아직 9월이라고 생각하는데 몸은 조금 앞서서 다음 계절을 알아차리는 것 아닐까.
거기에 기억까지 붙는다
계절에는 개인 기록도 달라붙는다.
학생 때는 여름방학이 끝났다.
어른이 되면 올해가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예전 학교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군대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오래전 사람을 떠올린다.
그래서 가을의 쓸쓸함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다.
빛이 줄어든다.
소리가 줄어든다.
공기가 차가워진다.
여름이 끝난다는 기억이 붙는다.
그리고 세상은 조금씩 밤과 겨울 쪽으로 움직인다.
봄은 대체로 뭔가 생기는 계절이다.
가을은 예쁜데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많다.
잎이 물든다.
그리고 떨어진다.
공기는 좋아진다.
그리고 해는 빨리 진다.
매미는 요란하게 운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없어진다.
가을이 쓸쓸한 이유는 어쩌면
무언가 나쁜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주변에서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몸이 계속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름이 끝났다는 것은
달력보다 귀가 먼저 알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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